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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이상무 그리고 독고탁의 시대

작성자
박석환
작성일
2016.02.19
조회
2,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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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3일 이상무(본명 박노철, 1946년 경남 김천 출생) 선생님이 마포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심장마비로 우리 곁을 떠났다. 향년 70세. 선생님은 마지막 떠나는 날에도 태블릿 컴퓨터 앞에 있었다. <울지 않는 소년>이라는 걸작을 남긴 선생님은 종종 ‘늙지 않는 소년’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만큼 동안이었고 운동도 즐겼던 터라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너무 이른 소식이었다. 연초에 전해진 소식에 많은 이들이 이상무와 그의 만화를 이야기했다. 그래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상무와 그의 만화를 추억하고자 한다. 

1. 이상무 또는 독고탁과의 추억
“유년시절 이두호의 만화로 한글을 깨우치고 
이상무의 만화로 울지 않는 법을 배우며 성장했다. 
이현세의 만화를 보며 도전하는 남자의 매력을 알았고 
허영만의 만화를 통해 현명한 어른으로 사는 방법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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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꼴찌> 中. 그 시절 우린 모두 독고탁이었다.

오래전 한 매체에서 필자소개를 써달라고 해 정리한 문장이다. 만화와 관련된 글만 쓰는 터라 약력이나 경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만화와 함께 성장한 사람’이라는 점을 알리고 싶었다. 기실 내게 이두호의 만화가 한글 교과서였다면 이상무의 만화는 사회 교과서였고 도덕 교과서였다. 선생님의 만화를 통해 가족과 공동체를 배웠고 주인공 독고탁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과 삶의 태도 등을 배웠다. 그런 탓에 이현세와 허영만의 만화를 만날 수 있었으니 이상무의 만화는 내게 뿌리 같은 것이었다. 1997년 신춘문예에 만화평론이 당선된 후 만화계에 들어왔다. 좌충우돌하면서도 네 분 선생님에 대한 감사함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기고, 연구, 출판, 전시, 웹서비스 등 내가 하고 있거나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내 삶을 일군 ‘증표’들을 재현해 보이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젊은 치기였지만 기회가 되고 여력이 닿으면 실행함에 있어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두호 선생님에게는 정년퇴임 기념 문집(<조선을 그린 이두호>, 씨엔씨레볼루션, 2010)을 드릴 수 있었고 허영만 선생님께는 창작 30주년 헌정 평론집(<허영만표 만화와 환호하는 군중들>, 김영사, 2004)을 드릴 수 있었다. 이현세 선생님께는 석사논문집(<만화콘텐츠의 서사구조 분석-이현세 만화 천국의 신화를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2006)을 드렸다. 그런데 이상무 선생님에게는 드린 것이 없다. 

비슷한 것이 하나 있기는 하다. 2000년 초 만화포털사이트 코믹플러스를 오픈하고 일정 수준의 성과를 내고 있을 무렵 이상무 선생님의 작품을 디지털로 복원해 ‘이상무 특별관(관련보도; 전자신문, 2004. 2. 24)’을 개설했었다. 내 소년기를 형성했던 이상무의 만화가 지금 세대들에게도 유의미한 성찰과 영감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 믿었다. 


사과상자 속 죽어가던 독고탁
가칭 ‘이상무 만화 전작 디지털화 프로젝트’에 동의한 선생님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본인 명의의 만화책을 사과상자에 담아 보내주셨다. 상자에는 254작품 853권의 만화책이 담겨있었다. 세월의 독한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였을 책은 서있기 조차 힘겨운 노인 마냥 주저앉아 있었다. 가장 오래된 것은 스승인 박기준 선생님의 이름으로 신일문화사에서 1971년 발행한 <북만주 풍운아>였고 가장 최근 것은 2003년 프로야구협회의 주문으로 디지털싸이버에서 발행한 <독고탁의 이것이 야구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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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무 만화가 들어있던 사과상자. 배와 고추상자도 있다.

각종 세균과 곰팡이에 노출된 책은 이미 상당 부분 부식되어 있었다. 훼손되거나 낱권으로 남아있는 것도 많았다. 발행 당시의 지질도 좋지 않았지만 보관 상태 역시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이 책의 상태가 당대의 만화에 대한 인식이나 지위를 상징하는 것 같아 괜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주저앉은 책들을 일으켜 세워 상태를 파악하고 분류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당시 이 일에 나섰던 코믹플러스 직원들은 안면 마스크와 보호 장갑을 하고도 기관지 질환과 피부염을 앓아야 했다. 디지털 전환 대상 작품을 선정하는 데도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 디지털 복원이 책의 영구성을 획득하는 과정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스캐닝 방식은 일정 부분 책을 훼손하지 않고는 필요한 만큼의 데이터 품질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원고가 있다하더라도 복본이 없는 책은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인쇄된 책 자체의 보존 가치도 중하다 판단한 까닭이다. 1971년부터 1980년 사이에 발행된 122작품 307권이 대상에서 제외됐다. 초기 작품과 낱권으로 남은 작품이 제외되자 128작품 523권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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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의 상태가 좋아 내용물도 좋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다행인 것은 1970년 대에 발행된 작품 중 상당수가 재판됐다는 점이었다. 당시에는 ‘종이 수입 및 소비 제한’ 등의 이유로 만화도서는 3권 이내로 출판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규정에 맞춰 시리즈 형식으로 분할 발행된 작품 중 상당수가 1980년 대에 합본 형식으로 재발행 됐다. 가령 배달문화사에서 1974년 발행한 <독고탁은 영광의 한국인> <독고탁은 자랑스런 한국인> 1976년 발행한 <독고탁은 위대한 한국인>은 각 3권씩 별도의 제목으로 발행됐지만 하나의 대형서사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이후 이 제한 규정이 폐지되면서 이 작품은 1981년 삼현출판사에서 <한국인>(전 11권)이라는 제목으로 재발행 됐다. <세 친구>, <아스팔트>, <평원아>, <넓은 땅> 등의 작품이 이 같은 형식을 취해 재발행 됐다. 물론 작가의 인기가 더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어찌됐든 이 때문에 보존할 책을 제외하고도 ‘이상무 만화 세계’를 조명하고 일별할 수 있는 작품 목록이 마련됐다. 

문제는 스캐닝과 이미지 보정 과정이었다. 종이의 원료인 셀룰로오스는 습한 공간에 있으면 물기에 반응하면서 앞장과 뒷장을 달라붙게 만든다. 달라붙은 장을 인쇄면의 훼손 없이 때어내는 작업은 어찌 보면 ‘복불복게임’과도 같았다. 그렇게 사라진 인쇄면을 복원시키는 일은 적지 않은 노동을 요구했다. 종이에 인쇄를 할 때는 잉크 번짐을 막기 위해 산성충전물을 주입한다. 그런데 이 물질은 시간이 경과되면 종이를 누렇게 변색되게 만든다. 보통은 스캔한 후 표준 조정 값을 입력해 스캔 이미지의 감도를 통일하는데 이번 경우는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변색의 정도가 각 책별로 편차가 있어서 책별로 개별 값을 지정해줘야 했다. 사라진 글자를 찾는 일도, 일부가 잘린 페이지를 찾는 일도 간단치 않았다. 그저 가능한 모든 방식을 동원해 “사과상자 속에 누워있는 책을 컴퓨터 모니터 속에 세워 달라!”고만 했다. 그렇게 ‘이상무 만화 전작 디지털화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우왕좌왕하던 일들이 하나둘 체계를 갖추게 되면서 목표했던 작품 목록이 이미지 데이터로 서버에 쌓였다. 당시 이 일을 함께 했던 이호석, 김종필, 이대연, 최호필 등 동료 직원들의 이해와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이상무 만화와 독고탁 콘텐츠에 담긴 정서와 가치가 그들을 움직인 힘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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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분류 작업을 하던 담당자의 책상 풍경.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다.

그러고도 수개월의 정리와 사이트 구축 작업이 진행된 후 코믹플러스에 이상무 특별관이 오픈 될 수 있었다. ‘돌아온 이상무와 독고탁’이라는 콘셉트는 많은 언론의 주목 애호가들의 지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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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이상무 특별관 오픈 프로모션 페이지

당시 코믹플러스가 작업한 데이터와 도서 등의 자료는 이상무 선생님이 2013년 소장하고 있는 만화 원고와 관련 도서 일체를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기증하면서 일부 이관됐다. 그리고 내 개인 PC에는 당시 스캔한 로우데이터(원본파일)를 제외하고 직접 작성했던 메타데이터(원본파일에 대한 목록 및 분류 자료)와 페이지 구성을 위한 스토리보드, 언론 보도자료 등이 남아있다. 당시 자료를 바탕으로 지금은 사라진 ‘이상무 특별관’의 작가소개와 작품소개란을 재현해본다. 물론 이 원고의 형식과 체계에 맞춰 다시 썼다.


2. 박노철, 이상무로 살다
만화가 이상무는 1946년 경남 김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박노철. 어린 시절부터 만화에 재능을 보였던 노철은 김천중앙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63년 대구 ‘영남일보’ 아동 지면에 주 1회 4칸 만화를 연재했다. 본격적으로 작가 수업을 받기로 한 박노철은 1964년 상경해 당시 <두통이> 시리즈로 유명했던 박기준(1941년 생) 문하에 들어간다. 박기준은 형 박기정(1937년 생)과 함께 한국서사만화의 큰 맥을 형성한 스승이자 출판인, 교육인이었다. 박노철은 이 화실에서 박기정․박기준 형제의 작업을 도우며 작가 수업을 받았다. 박노철의 옆자리에는 한국카툰계의 큰 어른이 된 김마정(1943년 생), 바짓저고리 만화로 대표되는 이두호(1943년 생), 스포츠와 첩보물로 일가를 이뤘던 이우정(1943년 생), 불청객 시리즈로 유명한 고행석(1948년 생), 영심이와 변금련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배금택(1949년 생)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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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15일.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만났었다.

박노철은 그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1966년 박기준은 학생교양잡지 ‘여학생’을 창간하면서 <노미호와 주리혜>라는 학원만화를 구상하고 ‘이상무’라는 필명으로 자신도 연재를 했는데 그림 작업을 박노철에게 맡겼다. 잡지가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고 작품도 큰 인기를 얻게 되자 박기준은 작품의 전권과 이상무라는 필명을 박노철에게 줬다. ‘이상무’라는 작가가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박노철이 본격적으로 ‘이상무’가 된 것은 1972년 독립 이후였다. 당시까지 박기준 화실 일을 계속했던 박노철은 <주근깨>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자신만의 캐릭터 ‘독고탁’을 내세웠다. 박기준의 명랑체나 약화체 스타일보다는 좀 더 극화적인 화풍과 입체적인 인물형을 제시했다. ‘독고’라는 성씨가 지닌 희귀성과 서정성, ‘탁’이라는 이름에 담긴 동작성과 명랑성은 그대로 ‘이상무 만화’의 내용이 됐고 그의 만화를 당대의 만화와 구분 시키는 정서가 됐다. 


독고탁, 한국만화의 대표 아이콘
<주근깨> 이후 이상무는 <독고탁은 개구쟁이>를 시작으로 눌러왔던 창작욕을 분출이라도 하듯 다종다양의 작품을 단행본으로 발표한다. 1977년 <독고탁과 격동하는 넓은 땅>에 이르기까지 무려 80여 작품이 ‘독고탁~’ 형식으로 발표됐다. 주로 초기작은 상록문화사와 배달문화사가 발행했고 1976년부터는 소년한국일보사로 자리를 옮겨 발표했다. 대본 만화계를 대표하는 스타 작가가 된 것이다. 제목에 ‘독고탁~’을 붙여야 팔린다는 출판사의 주문도 있었지만 이상무의 의지도 컸다. 캐릭터 중심의 만화가 일반화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이 같은 전략은 당대 만화계에 성공사례로 회자됐다. 이상무 이후 톱스타 만화가의 바통을 넘겨받은 이현세가 ‘오혜성’을, 허영만이 ‘이강토’라는 캐릭터를 내세운 것 역시 ‘독고탁’으로 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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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상자에서 발행시기가 가장 오래됐던 책. 스물 여섯살 이상무의 꿈이 읽혔다.

단행본 중심의 대본 만화계를 정복한 이상무는 1976년 ‘소년중앙’에 <우정의 마운드>를 연재하며 본격적으로 잡지만화계에 진입한다. 1978년에는 ‘소년중앙’에 <비둘기 합창>, ‘어깨동무’에 <울지 않는 소년>을 동시 연재하며 ‘이상무 만화 전성시대’를 연다. 두 작품은 지금도 회자될 만큼 큰 인기를 얻었다. 1982년 대본계에는 이현세라는 신예가 <공포의 외인구단>이라는 대작을 발표하며 극화의 시대를 열었다. 기존의 만화풍을 ‘소프트 극화’로 분류해야 할 만큼 이현세 만화의 형과 식은 강렬했다. 하지만 잡지계에서는 아직 이상무였다. 


이상무, 결코 울지 않았던 현역
이현세라는 추격자가 생겼지만 이상무의 선도적 행보는 늦춰지지 않았다. 1983년 <달려라 꼴찌>를 발표하며 1989년 연재가 종료될 때까지 ‘이상무의 시대’는 지속됐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이현세로 대표되는 극화의 시대는 이상무 만화의 감성과 유머에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거기에 신예 작가 그룹을 중심으로 코믹의 시대가 열리면서 이상무 만화는 대본계와 잡지계 모두에서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상무는 여전히 이상무였다. 
이상무는 1992년 ‘스포츠조선’에 <싱글로 가는 길>을 발표한다. 성장한 자신의 팬층을 따라 활동 거점을 신문으로 옮기고 이상무 만화의 ‘경쾌한 열정’을 골프라는 아이템에 담아냈다. 마치 울지 않고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했던 그 소년처럼 이상무는 왕좌에서 내려온 후로도 멈추지 않고 자기 자리를 찾아냈다. 2009년 유년시절에 대한 자전적 만화 <감또깨이 입에 물고>를 발표할 때까지 그의 작업은 계속됐다. 2016년 1월, 펜을 놓는 그 순간까지도 이상무는 현역으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만화를 그리고 있었다. 2013년 네이버 웹툰에 단편 <추억여행>을 발표했다. 가수 전인권의 요청으로 작업했던 일러스트가 사후 공개(‘눈눈눈눈’, 전인권 밴드)되며 유작이 됐다. 1966년 <노미호와 주리혜> 이후 꼭 50년간이다. 


3. 이상무 만화의 작품 세계 또는 다섯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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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오픈 한 코믹플러스 이상무 특별관

이상무 만화는 작품 활동 시기별로 크게 다섯 가지 작품군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1970년 초 소년 독고탁을 등장시킨 ‘가족 명랑’ 성향의 작품군이다. 
두 번째는 1970년 대 중후반 청년 독고탁이 등장하는 ‘항일(抗日)’ 소재 작품군이다. 
세 번째는 1980년 대 청소년 독고탁이 등장하는 ‘명랑 스포츠’ 소재 작품군이다. 
네 번째는 1990년 대 성인 독고탁이 등장하는 ‘일상, SF, 또는 암흑가 액션’ 작품군이다. 
다섯 번째는 1990년 대 중후반부터 선보였던 성인 대상의 ‘골프 소재 실용 극화’ 작품군이다. 


1시기 ; 맹랑한 소년, ‘가족’과 맞서다
이상무 만화에 담긴 기본 정서는 ‘가족’이다.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드라마에서 주인공 독고탁은 주로 말썽쟁이, 고집쟁이, 신경질쟁이 소년으로 묘사된다. 안정 상태의 가족에 작은 균열이 생기면서 큰 위기가 닥쳐온다. 독고탁은 그 같은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족의 일원이나 상황에 대립하며 이탈 행동을 한다. 초기 산업화 사회의 과도한 노동 강도와 물질주의가 만들어낸 풍경이었지만 해결은 온전히 개인과 가족의 몫이었다. 힘없는 사람들끼리 서로 용서하고 화해해야 겨우 살아지던 시절. 그래서 어린 독고탁의 반항과 화해는 웃기기도 했고 서글프기도 했다. <독고탁 하늘에 외치다 (흥진문화사, 1972)> <독고탁의 엄마 (흥진문화사, 1972)> <독고탁 내일은 웃자 (상록문화사, 1972)> 등의 작품이 이 시기를 대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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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독고탁> 표지. 일하다 힘들면 펼쳐보고는 했다.


2시기 ;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사내, 시대와 싸우다
초기의 가족 드라마가 이상무 만화의 기본 정서를 만들었다면 이 시기의 작품군은 ‘독고탁’이라는 캐릭터의 ‘숙명성’을 강조했다. 가족이라는 정서적 공간성은 유지되지만 활극적 요소가 강화되면서 서사의 공간과 무대가 확대됐다. 소재 차원에서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독립군 투쟁사’나 해방 후 일본에 터를 잡은 재일교포의 ‘스포츠 극일기’가 주를 이뤘다. 이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1973년 도쿄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 사건, 1974년 재일교포 문세광에 의한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 등이 발생하면서 우리 사회의 반일 정서는 극에 달해 있었다. 만화사적으로는 독자들의 높아진 눈높이와 달리 당국의 심의 규정으로 인해 표현과 묘사가 제한받던 시절이다. 이상무는 일제강점기 일본과 독립군으로 나뉘어 싸우는 형제, 일본 대표와 한국 대표로 나뉘어 야구 대결을 벌이는 재일교포 형제 등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 선 주인공’을 그렸다. 자기 만화의 핵심 가치(가족)를 지키는 한편, 시대적 요구(반일 정서, 표현수위 확장)도 모두 수용한 선택이었다. 기실 많은 이들이 이상무 만화의 명랑성을 기억하지만 대다수의 작품은 매우 비극적 정서를 담고 있다. 어찌 보면 비극적 서사가 바탕이 되어 오히려 명랑성이 부각됐을 것이다. <독고탁은 자랑스러운 한국인 (배달문화사, 1975)> 시리즈, <독고탁은 평원아 (소년한국일보사, 1976)> <독고탁과 끝없이 넓은 땅 (소년한국일보사, 1977)> 시리즈 등이 이 시기를 대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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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작품들의 표지 모음. 지금은 작업 중 캡처한 이미지만 남아있다.


3시기 ; 울지 않는 소년,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다
대본소용 단행본 만화로 큰 인기를 얻은 이상무는 잡지 연재만화에서도 그 위상을 이어가며 1980년 대 만화계를 자신의 시대로 만들었다. 대본 만화와 잡지 연재만화는 독자층, 소재와 작풍, 작업 분량과 방식 등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인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만화가들은 두 영역 중 한 분야를 선택해 작업해 왔고 이 같은 경향은 현재까지도 일부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당대의 이상무는 만능이었다. 대본계에서 잡지계로 넘어온 이상무는 앞선 두 시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독고탁을 그려냈다. 여전히 ‘가족’ 안에 있지만 어리지 않아 책임감이 있고 ‘운명’적 고민도 있지만 세상을 어둡고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주인공이었다. 이전 작품군이 태생적 한계나 외부 환경에 대한 반발을 보여줬다면 이 시기의 작품들은 주인공 스스로에 대한 ‘자기극복’이 주 테마였다. 대중에게 가장 넓게 알려진 ‘낙천적 열정의 주인공, 울지 않는 소년,  독고탁’이 완성된 것이다. 축구, 야구 등 스포츠를 소재로 ‘꿈,’ ‘도전,’ ‘우정,’ ‘협동,’ ‘승리,’ 등의 가치를 전달하는 밝고 건강한 작품이 주를 이뤘다. <우정의 마운드 (중앙일보, 1980)> <아홉개의 빨간모자 (백조문고, 1982)> <울지 않는 소년 (동광출판사, 1983)> <달려라 꼴찌 (삼현출판사, 1984)> 등이 이 시기를 대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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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의 빨간모자> 中. 저 삼각관계가 그 시절 소년들을 뜨겁게 했다.


4시기 ; 나이든 소년, 어른들의 ‘이계’에 빠지다
70년대 이상무가 당대 만화계의 새 시대를 연 신예였다면 80년대에는 이현세를 중심으로 한  극화, 90년대에는 만화잡지 ‘점프,’ ‘챔프’로 대표되는 코믹스가 있었다. 시대가 달라지고 독자층이 변모하면서 이상무 만화 역시 이 같은 흐름을 수용한다. 하지만 이상무 만화의 외적 형식은 극화의 격렬함과 코믹스의 경쾌함을 따라가지 못 했다. 민주화와 고도산업화라는 시대적 배경도 한몫했다. 이상무 만화의 중심 정서였던 ‘가족’은 더 이상 ‘개인’ 위에 있지 않았다. 이상무 만화에서 가족이 사라지자 핵심가치였던 ‘용서와 화해’의 드라마 역시 전개되지 않았다. 홀로된 ‘개인의 분노’와 ‘사적 보복’만이 남게 됐다. 결코 울지 않았던 독고탁은 성인만화잡지 속에서는 연일 좌절했고 대본용 단행본에서는 여느 만화의 주인공들처럼 야수적 본능과 신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포장마차 (자유시대사, 1988)> <검은 휘파람 (자유시대사, 1995)> 같은 문제작도 있었지만 <전설의 영웅 (민들레문화사, 1991)> <황제 (민들레문화사, 1995)> 등의 작품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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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휘파람> 中. 흥미로운 소재였지만 독고탁스럽지는 않았다.


5시기 ; 독고탁을 지우고 ‘실용’을 얻다
90년대 중후반에도 이상무와 독고탁은 뛰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독고탁은 암흑가 보스부터 SF 영웅, 기업 대표까지 자신의 캐릭터성과 아무 연관 없는 이야기 속에 있었다. ‘독고탁 같지 않은 독고탁’ 시리즈가 이어지면서 이상무 만화의 유효기간은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이상무는 전혀 다른 카드를 들고 다시 등장했다. 소년 또는 청년의 낙관성과 열정을 대표하던 독고탁의 자리에 금발의 여자 주인공이 섰다. 열정적 서사는 사라졌고 그 자리에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만큼의 에피소드가 배치됐다. 발표 무대도 단행본이나 잡지가 아니라 신문이었다. 이상무 만화와 함께 성장해 이제는 골프가 궁금한 독자들을 정 조준했다. ‘올 뉴 이상무 만화의 새로운 출발’이었다. 골프 영웅 박세리의 성공신화가 일반화되기 전에 진행된 도전이었고 이상무 만화의 한계를 한 번 더 확장해낸 성공적 시도였다. <불타는 그린 (서울문화사, 1997)> <싱글로 가는 길 (삼호미디어, 2001)>  등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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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그린> 中. 기실 이상무의 창작방향은 매우 전략적이었다.


4. 굿바이 이상무, 굿모닝 독고탁
여기까지. 코믹플러스가 2004년 작업했던 ‘이상무 특별관’은 당시 쓴 작가소개와 장르별 작품소개 페이지 등으로 구성됐다. 그리고 각 테마에 맞춰 해당 작품을 유료로 열람할 수 있도록 꾸몄다. 앞서 밝힌 것처럼 위 글은 당시 구성에 맞춰 2016년 기준으로 다시 쓴 것이다. 당시 이상무 특별관을 채운 또 하나의 아이템이 리뷰와 코멘트였다. 2004년 오픈 시점 이전에 ‘이상무와 독고탁’을 논했던 만화평론가들의 문장을 게재했었다. 선배평론가들이 남긴 문장의 힘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원고의 결론부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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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 한 켠에 있는 독고탁. 이 친구가 오래도록 살아있길 빈다.

손상익은 “만화 매체의 효용(效用)을 청소년들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주는 것이라고 정의할 때, 이상무 만화는 이에 가장 합당하다.”고 했다.
박인하는 “이상무는 가족공동체에 주목하는 작가다. 서로의 고통을 나누어지는 가족공동체를 그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부재의 슬픔이 주는 비극을 그린다.”고 했다. 
정준영은 “짧은 문장으로 거칠게 요약해 보자면, 독고탁이 1970년대식 희망을 표현하는 반면 까치는 1980년대식 좌절을 표상한다.”고 했다. 
시인 함성호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저보다 두 배나 큰 선수들을 이리저리 농락하며 슛을 성공시키는 독고탁의 축구 실력에서 느끼는 통쾌함’에서 이상무 만화의 매력을 찾았다. 
딴지일보 기자 파토는 “불우한 가정환경, 퀵서비스 하이바만한 대갈통 그리고 존만한 키의 핸디캡을 모두 극복하고 강타자들을 무기력하게 삼진 처리하던 마구의 투수. 우리는 만화방에서 독고탁의 투구 하나하나에 주먹을 불끈 쥐어가며 열광했었다.”며 그 시절을 소환해 냈다. 
여기에 더해 나는 “그 시절 우린 모두 독고탁이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이상무의 만화와 독고탁은 우리와 함께, 우리 시대를 살아냈다. 우리를 위로했다. 우릴 움직이게 했다. 그래서 멈춰 선 이상무가 아프다. 


독고탁을 추억하기 위한 몇 가지 방법
2016년 1월 3일 이후부터 2월 19일 현재 네이버 뉴스에서 ‘이상무’와 ‘독고탁’을 키워드로 검색해보니 총 370건의 기사가 나왔다. 이상무와 독고탁의 시대를 함께 한 많은 이들이 있고 미디어가 이에 주목하고 있다는 증거다. 갑자기 떠났다고 하지만 돌아보면 선생님은 오래전부터 신변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전 작품에서는 내 유년시절의 안 좋은 기억만 작품에 남아있다며 2006년 자전적 만화 <감또깨이 입에 물고>를 발표한 바 있고 2013년에는 어머니를 소재로 한 단편 <추억여행>을 네이버웹툰에 게재하기도 했다. 같은 해 평생의 짐이기도 했을 3만여 점의 만화원고와 소장도서를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기증하기도 했고 2014년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한 ‘돌아온 독고탁’전이 한국만화박물관에서 열리기도 했다. 떠난 뒤였다면 더욱 안타까웠을 일들이 생전에 정리된 셈이다. 하지만 아직 아쉬운 부분도 있다. 

먼저 ‘이상무 만화 도록 발간’이다. 반백년 동안 만화만 고민했던 그의 작품 목록과 작품 속 면면들은 현대만화의 지형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찾을 수 있는 지도 역할을 할 것이다. 몇 해 전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김종래 작품 도록>을 발간한 바 있는데 이를 예시로 이상무 선생님의 기증자료를 면밀히 검토한다면 조금 더 진화된 ‘만화도록’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상무 추모 평전 발간’도 필요하다. 최근 한국만화가협회를 중심으로 추모전시 개최가 준비되고 있다. 당연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고인이 된 고우영 선생님의 경우 주기별로 추모전시와 기념사업이 진행되기도 했다. 2008년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때는 씨네21에서 <고우영이야기>가 평론 모음집 형식으로 발행됐는데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물론 급하게 서둘러 하는 것보다 늦더라도 꼼꼼하게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 

다음은 ‘이상무 만화상 제정’이다. 이제 우리에게도 윌아이스너상이나 데즈카오사무상 같은 작가명 시상이 필요하지 않을까.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있고 김성환 선생님이 사제를 털어 ‘고바우 만화상’을 운영하고 있지만 한번쯤 논의 해 볼 필요가 있다. 아무래도 ‘고바우’의 상징성은 시사만화에 있다. 반면 이상무 만화가 지닌 서사성과 작가와 캐릭터의 스타성 그리고 50년 외길 인생 등이 지닌 의미는 조금 다르게 작동할 것이다. 

마지막은 ‘이상무 추모 만화관’ 개설이다. 독자적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좋지만 한국만화박물관 내 도서관의 특정서가나 전시관 내 일부 영역 또는 외부 공간에 선생님의 업적을 기릴 수 있는 기념물을 만드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외부 공간에 설치된 ‘작가의 손’과 ‘만화비’, ‘캐릭터 동상’ 등이 한 예가 될 것이다.  
이와 맞물려 예비해야 할 것들 몇 가지도 적어본다. 해방 후 본격화된 한국만화계의 현대가 하나둘 저물고 있다. 저문 후보다 저물기 전이 중요하다. 또한 과거와 달리 도서의 형태가 아닌 비도서 형태의 웹툰이 더 많이 발행되고 있고 창작의 주체는 필명 사용 비율이 늘고 있고 발행의 주체인 매체는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만화 유산의 수집과 보존, 기록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상황이다. 만화가 협회단체 및 디지털만화규장각의 ‘만화가 인명 DB’가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도서납본 관리 책임을 맡고 있는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에서 도서/비도서 포함 만화 관련 발간 자료가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도 봐야한다. 그 역할을 일부 나눠지고 있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만화규장각사업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도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이렇게 수집된 자료가 어떻게 정리되고 활용할 수 있는 상태로 제공되는지도 살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작고하셨거나 현업에서 멀어진 작가들의 저작물에 대한 권리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도 봐야한다. 필요하다면 ‘만화 자료 DB 체계화 및 접근성 강화 사업’ 등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고 ‘만화유산관리위원회 및 TF팀’ 등이 운영되어야 할 것이다. 

  ■ 작가에 대하여

이상무(본명 : 박노철, 朴魯哲)
1946년 8월 15일 ~ 2016년 1월 3일

- 약력 -
△ 출생 : 1946년 경상남도 김천
△ 입문 : 1963년 고등학교 3학년 때 대구 영남일보 어린이면에 4칸 만화 연재 
△ 수련 : 1964년 박기정, 박기준 문하
△ 데뷔 : 1966년 박기준 문하에서 잡지 ‘여학생’에 ‘노미호와 주리혜’ 연재
               (필명 이상무 첫 사용)
          1972년 독립 후 단행본 <주근깨> 발표(주인공 독고탁 첫 등장)
 
- 주요작품 -
△ <노미호와 주리혜> : 1966년 ~ 1985년, 월간 ‘여학생’
△ <우정의 마운드> : 1976년 ~ 1978년, 월간 ‘소년중앙’
△ <비둘기 합창> : 1978년 ~ 1980년, 월간 ‘소년중앙’
△ <울지 않는 소년> : 1978년 ~ 1981년, 월간 ‘어깨동무’
△ <아홉개의 빨간모자> : 1981년 ~ 1983년, 월간 ‘어깨동무’
△ <다시 찾은 마운드> : 1982년 ‘소년한국일보’
△ <달려라 꼴찌> : 1983년 ~ 1989년, ‘소년중앙’
△ <포장마차> : 1988년 월간 ‘만화광장’
△ <싱글로 가는 길> : 1992년 ~ 1995년, ‘스포츠 조선’
△ <불타는 그린> : 1996년 ‘일요신문’
△ <감또깨이 입에 물고> : 2009년, 아키온

- 영상화 작품 -
△ <독고탁 태양을 향해 던져라> : 1983년, 대원동화
△ <독고탁2-내 이름은 독고탁> : 1984년, 대원동화 
△ <독고탁3-다시 찾은 마운드> : 1985년, 대원동화
△ <비둘기 합창> : 1987년, MBC

- 수상/ 선정 -
1978년 도서잡지윤리위원회 우수만화상 (수상작 : <비둘기 합창>)
1980년 문화공보부 추천도서 선정(선정작 : <비둘기 합창> <현해탄 너머>)
1992년 YWCA 좋은 만화 선정(선정작 : <달려라 꼴찌>)
2008년 우람청소년문학상 특별상

- 주요활동 -
1978 ~ 1982년 한국만화가협회 이사
1994 ~ 1996년 명지대학교 사회교육원 만화예술창작과 지도교수
2004년 이상무 특별관 오픈, 코믹플러스
2013년 만화원고 30,332점, 단행본 650점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기증

- 관련 사이트 -
‘늙지 않는 소년 이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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