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리뷰
작성일 2018.10.02 조회수 374

아무튼, 그는 프랑스에 살고 있는 듯 하다.

<아무튼 나는 프랑스에 산다> (박윤선 작)

 

이선인(만화평론가)

 

2015년에 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가 베스트 셀러에 진입했다. <한국이 싫어서>는 한국에서의 업무에 지친 한 20대 청년이 무작정 회사를 그만두고 호주로 떠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인 계나는 이 작품 내에서 두 번 호주로 떠나는데, 처음에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 대한 부정적 발로로 호주행을 택하지만 그 다음에는 ‘나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기 위해서 선택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 텍스트에 대한 대중의 호의적 시선은 어느 하루아침에 불쑥 나타난 것이 아니다. 애당초 장강명은 <한국이 싫어서>를 완성하기 위해 르포르타주를 거쳤음을 밝히고 있으니 만큼, 이 텍스트는 이미 발현되고 굳혀져가고 있던 청년세대의 어떠한 의식을 정확히 겨냥하고 만들어낸 철저한 기획 소설에 더 가깝다.

 

 


 

일본의 영화감독(이자 코미디언인) 기타노 다케시가 ‘가족은 누가 보고 있지 않을 때에 갖다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했다. 이 말을 조금 바꿔서 ‘국가란 어디 좋은 것과 바꿀 수만 있다면 냉큼 바꿔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한다고 해도, 기타노 다케시의 언어에 대한 공감대와 동일한 규모의 지지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전자가 ‘가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서의 이탈을 말한다면, 후자는 ‘국가주의’에서의 이탈을 말한다. 어느새 거시적 규합을 종용하던 고전적 이데올로기들은 하나둘 해체되고 있으며, 현대의 청년들은 그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이제 ‘국가’라는 카테고리 안에 개인 각자가 소속감을 느끼지 않으며 국가를 자신의 규정하는 항목의 일종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성세대는 청년들이 말하는 이러한 ‘탈조선’의 담론에 대해 극적인 반발을 보이기도 하지만, 민(民)이 주(主)한 사회에 있어 구성원 개인이 국가라는 개념을 개인의 개념 안으로 축소하여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은 도리어 고무적인 성질로 인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 있어서 ‘탈조선 담론’이라는 것이 지독한 과열의 형상으로 붕괴되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시대정신의 일부로써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이 사고의 진행 안에서 어떤 개념들은 미시적으로 분해해서 판단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탈조선’이라는 단어에서는 어떠한 불완전성이 느껴진다. 탈조선은 조선(=대한민국)으로부터 탈(=이탈)한다는 의미에서의 목표의식 혹은 권장되는 행위 일반을 말한다. 이 단어가 불완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 단어는 이탈의 이후를 규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에서 빠져나간다는 1차의 목표를 달성한 이후에는 어딘가 목적을 삼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러한 ‘탈’의 행위가 기존 국가의 불온성에 대한 반발이라면, 목적지에 대한 개념은 이항대립의 형국을 띌 수밖에 없다. 즉, ‘조선’을 기준으로 ‘더 낫거나, 더 모자라거나’ 라고 설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모두는 조선에 비해서 ‘더 나은’ 곳을 향하려 한다.

 

그래서 대체로의 목적지는 소위 제1세계로 불리는 곳들-북미, 서유럽, 북유럽, 오세아니아-로 한정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정확히 정립되는 한, 목적지로써의 그들은 조선에서의 체험보다는 훨씬 더 안정적인 혹은 가치 있는 경험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의식이 결합될 때에 비로소 ‘탈조선’이라는 개념은 완성된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 특히 타인들보다 먼저 그곳에 정착했던 선배들은 그러한 의식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맹목성에 대해 강변한다. 이들이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크게 자르자면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 판타지가 실재하고 있음을 경험으로 증명해주거나 둘째, 실제 생활은 판타지가 아님을 확인시켜주거나. 그리고 아마도 많은 경우 이야기의 무게는 후자로 기울 것이다. 그것은 다른 이유가 없다. 실제로 그러한 삶이란 생각만치 쉽지만은 않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만화가인 박윤선은 단편집 <밤의 문이 열린다> 출판 이후, 프랑스에서 활동할 수 있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통해 프랑스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프랑스어를 배우며 작업을 하던 중, 프랑스 출판사와 작업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고 프랑스인 파트너와 함께 살게 되면서 프랑스에 안착하게 되었다. 이후 한국에도 출간된 <개인간의 모험>과 파생된 몇 개의 연작(<미미의 정원>, <말썽쟁이 고양이 클럽>)으로 작품 활동을 유지하게 된다. <아무튼 나는 프랑스에 산다>는 그 이후에 출간된, 프랑스에서의 삶을 그린 자전적인 작품이다.

 

말하자면, 이 작품 역시 이미 그곳에서의 삶에 적응한 선배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만화다. 다만 <아무튼 나는 프랑스에 산다>는 상기에 말한 두 가지 방법론, 즉 판타지에 대한 실재 혹은 부재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는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해 총 1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있는 이 작품은 대부분의 경우 프랑스에서 조우하게 된 특정한 사람의 이야기로 운을 뗀다. 하지만 그 어떠한 에피소드도 처음에 제시한 그 사람의 이야기를 순탄히 따라가지 못한다. 담담한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걸핏하면 연계되는 다른 샛길로 새어버리고 만다. 그러다보니 이 작품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표현 중 하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일 정도로 태도에 있어서 나이브함을 보이고 있다. 언어조차 아직 통하지 않는 타국에, 혼자의 몸으로 느닷없이 던져져 발생하게 되는 일촉즉발의 에피소드 따위는 이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는 ‘타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일관성이 보인다. 첫 에피소드에서의 아르메니아인 L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프랑스를 여행하는 재일교포들의 이야기 까지, 박윤선은 프랑스라는 사회 안에서 마주했던 타자들을 관찰했던 에피소드들을 나열한다. 상기 이야기한대로 각 에피소드는 쉽게 샛길로 빠지고 말지만 그러한 샛길에서 조차도 타자에 대해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말하자면 <아무튼 나는 프랑스에 산다>는 타국에 도래한 타자의 눈으로 본 타자의 이야기로 응축이 가능하다.

 

다만 그는 이러한 관계를 철저하게 객체 대 객체의, 그러니까 개인 간의 관계로써만 다루며 개별적인 인물들이 가진 배경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다. 이를테면, 첫 에피소드에서 조우한 아르메니아인 L이나 아프리카계 청년 그리고 아프리카계 이웃 Y에 대해 말할 때에는 전적으로 작가 본인이 받은 인상과 그들이 그 안에서 보여준 태도만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들은 자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 프랑스로 이민할 수밖에 없다는 배경적 사안을 공유하며, 박윤선은 그것을 이야기의 내부에서 풀기 보다는 에피소드 뒤 쪽에 해당 사안들의 배경을 글로 짤막하게 설명함으로써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박윤선은 타자의 아이덴티티로 타자들을 보지만, 그들과 자신을 일종의 공감대로써 묶는 작업은 하지 않는 셈이다. 그는 타자라고 하여 모든 것을 동일시 할 수 있다거나, 혹은 모두가 다 측은지심의 태도로 얽혀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객체의 인간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객체인 박윤선 자신은 그 모든 것을 그 자리에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판단유보는 다섯 번 째 에피소드인 하르키 할아버지에 이르면 좀 더 첨예해진다. 알제리 독립전쟁 때 프랑스 군에서 활동했던 알제리인을 말하는 ‘하르키’는 그야말로 명확한 판단이 불가능한 중간의 존재이다. 알제리인들로 부터는 배신자의 오명을, 프랑스로부터는 격리처분이라는 치욕을 받은 그들은 어떠한 멍에 하나로 싸잡아서 판단하기 너무나 불가해하기 때문이다. 하르키들이 하르키가 된 이유에는 각자 자신의 삶에서부터 발생한 선택의 결과가 도사리고 있다. 이들의 선택을 명확하게 ‘무엇이다’라고 판단하기에는, 너무나 모호한 지점임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자신이 조우한 인물의 배경에 이러한 ‘사실’이 존재하고 있음을 말할 뿐, 판단이라는 결론을 내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박윤선은, 이들의 문제가 모두 소속의 문제라는 사실만은 넌지시 내비치고 있다. 고향이라는 국가로부터 자의로 혹은 타의로 소속을 포기하게 된 사람들, 집이라는 물리적 소속을 온존하지 못해 거리로 내앉게 되는 사람들, 그리고 하르키 할아버지처럼 중간자로써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소속의 부재라는 난제에 허덕이고 있는 셈이다. 박윤선의 섬세함은 이러한 모든 소속의 위기에 경중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물론 실제로 문제의 경중이 존재하지 않는 셈 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박윤선은 \'판단 유보\'의 관점을 고수한다. 말하자면 소속 부재의 문제는 모두에게 불안이라는 심리를 야기한다. 단, 이 안에서의 심도는 아무도 측정할 수 없다. 그것은 각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박윤선의 질문은 자신의 근원적인 쪽으로 향한다. 10번째 챕터에서, 오랜 프랑스 생활의 도중 잠시 한국에 온 그는 한국의 생경함에 놀라지만 이내 익숙해진다. 물론 이 익숙함은 일종의 호오적 작용은 아니라고도 명시한다. 그 직후, 그는 프랑스에서의 삶에 있어 스스로 국가라는 개념에 얽메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 고백이 재미있는 점은 국가라는 개념에 얽매이기 싫었다는 고백과 거의 동시에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난 국가와 관련된 것들이 그렇게 거슬렸나 보다.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피해 다닌 것 같다.”라는 그 고백의 안에는, 스스로 소속을 거부했다는 사실이 역으로 속박되도록 유도한 것을 깨달은 것처럼 읽힌다. 마치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기’와 유사한 심리적 발현처럼.

 

 


 

그렇다면 속박으로부터 탈출하는 길은 그것의 존재를 잊는 것이라는 뜻일까? 만약 이러한 의식으로 탈조선 담론을 바라본다면, ‘탈’이 말하는 이탈이란 물리적 영토로써의 ‘조선’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만을 말하지 않게 된다. 탈(脫)을 망(忘)으로 바꿔 사고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주의 무용이나 무익함 따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시작 시에 의문을 가졌던 불완전함, 즉 부재한 목적 설정에 의해 발생하였던 이항적 목적지 설정에 대한 재정립에 가깝다. ‘지금 있는 이곳보다 더’ 라는 목적 설정은 결국 속박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박윤선이 이 작품을 통해 말해왔듯 ‘더 나은’이라는 상태는 한없이 모호해 규정이 불가능하며, 목적지가 어디이든 결국 소속이 부재한 상태에서는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불안을 해소하는 길은 잊는 것이다, 잊어서 ‘더 나은’이라는 목적 설정을 회피하는 것이다. 박윤선은 동일한 10챕터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다 문득 ‘국가’란 내가 마음을 정하기도 전에 무조건 사랑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진 이상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고. 이는 어디를 향하든 마찬가지인 것이다. ‘더 나을 것이니 사랑해야 한다’는 규정은 불가능하다. 그곳이 어디든, 당신이 소속되기까지 느낄 불안은 동일할 테니까 말이다.

 

 


 

이 작품의 제목이 ‘아무튼’ 나는 프랑스에 산다, 라는 사실이 문득 다시 떠올랐다. 그곳이 멋지기에, 편하기에, 아름답기에 사는 것이 아니라, 아무튼 살게 된 것이다. ‘아무튼’은 그 어떠한 가치판단도, 수행해야할 절대적 명령도 부여하지 않는 단어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딘가를 향해야 한다면 그 목적지의 설정 연유는 ‘아무튼’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어야 한다면 그 이유도 아무튼 이길 바란다. 선택에 속박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우리는 진짜 제대로 된 ‘아무튼의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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