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리뷰
작성일 2018.09.12 조회수 206

그래픽 노블로 읽는 범인전 - 범죄자를 다룬 전기문학

<내 친구 다머> (더프 백더프 작)

 

이복한솔(만화평론가)

 

그랜트 우드의 회화 <아메리칸 고딕>은 요모조모 뜯어보는 재미가 있다. 갈퀴를 든 남자와 비스듬히 선 여자, 두 사람의 표정이 참 딱딱하다. 고딕 회화에 나오는 중세 유럽인들은 온화한 척, 근엄한 척 뚱한 표정을 감추는 듯 한 꼴인데, 우드의 그림 속 아메리칸들은 대놓고 뚱하다. 뭐가 불만 인 걸까? 왜 그리 화면에 바짝 붙어있는 걸까? 야외에, 그것도 전원주택 앞에 서 있으면서 화면의 절반 이상을 몸으로 가리고 있는 꼴이 이상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여 그 까닭이 궁금하다.

 

<내 친구 다머>의 저자 더프 백더프의 작풍은 <아메리칸 고딕>과 닮았다. 인물의 길쭉한 얼굴과 뻣뻣한 자세, 딱딱하고 답답한 구도와 빈틈없는 화면, 거기에 더해진 은근한 익살까지 공통점이 속속 눈에 띈다. 제프리 다머에 대한 그래픽 노블이 읽을 만하다면 그것은 백더프의 작화가 어둡고 무거운 소재와 묘한 균형을 이루는 덕분일 게다.

 

제프리 다머는 1978년부터 1991년까지 13년에 걸쳐 17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다. 그의 이름은 90년대 미국 대중문화에서 이따금 사이코패스의 대명사로 사용되었으며, 여전히 가장 유명한 연쇄살인범의 예시로 언급된다. 시체도착자(necrophile)였던 그는 피해자의 시신을 상대로 성행위를 하고, 그것을 훼손하고, 일부를 먹거나 보관했다. 검거된 뒤에는 경찰, 학자, 언론인의 조사 및 취재에 협조하여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겼다. 모범수였던 그는 종신형을 복역하던 도중 같은 교도소에 있던 수감자에게 살해당했다. 머리가 훼손되는 바람에 그의 뇌에 대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사이, 만화가 백더프는 다머가 검거된 해부터 그의 청소년기를 다룬 전기를 그래픽 노블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한다. 잡지와 자비 출판을 통해 공개되어 이목을 끌었던 단편 만화는 백더프의 오랜 노력 끝에 <내 친구 다머>라는 제목을 단 장편으로 완성되었다. 작가가 다머와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그를 직접 목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머에 대한 모종의 안타까움과 후회가 동력이 되지 않았다면, 생각할수록 괴로운 인물에 대한 전기는 완성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안타까’워 했다는 표현은 저자가 다머의 범죄를 범죄 이외의 것, 무언가 다른 의미나 의의가 있는 것으로 다루었다는 의미가 아닌 점 노파심에 적어둔다.)

 

다머는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는 아웃사이더였다. 신체 조건이 좋았음에도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에게 맞서지 않았으며,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지냈다. 그가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은 음산하고 기괴했다. 뇌 질환 환자의 발작을 흉내 내거나 사람을 놀래는 돌출 행동을 하는 식이었다. 다친 사람을 보고 소리 내어 웃는 녀석, 로드 킬 당한 동물의 사체를 모으는 녀석, “그냥 어떤 모습일지 보고 싶었다.” 는 이유로 연못에서 잡은 개복치를 산산조각 내는 녀석을 친구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다. 다머는 시답잖은 장난이나 발작하는 시늉으로 광대 노릇을 하면서 또래 집단에 기웃거렸다. 그의 기행에 관심을 보이며 ‘다머 팬클럽’을 자처했던 백더프는 다머에게서 느껴지는 막연한 위협 때문에 그를 ‘마스코트’나 ‘만화 캐릭터’ 이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으며, 어느 순간부터는 일부러 피해 다녔다고 말한다.

 

 


 

다머를 ‘만화 캐릭터로 취급했다’는 표현은 백더프가 다머에게 느꼈던 거리감을 알기 쉽게 전하는 한편,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의 시선과 입장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 장치는 작품과 독자 사이의 좁혀지지 않을 거리를 상기시킴으로써 불필요한 감정이입을 차단하고 주제를 강조한다. 상황은 전달하되 동정이나 공감은 최소화하는 것이다. 작품 속 등장인물은 모두 실존 인물이지만 동시에 의도적으로 타자화 된 ‘만화 캐릭터’ 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의 진심을 알기 쉽게 호소하지 않는다. 우드가 그린 아이오와의 두 농민처럼 뚱한 태도로 일상을 영위할 뿐이다. 그들의 입장은 조심스럽고 건조한 내레이션으로만 전달된다. 독자들은 미래에 일어날 비극을 알고 있는 시간 여행자의 망령처럼 약간 불편하게 느껴지는 근거리에서 그들을 관찰할 수 있을 따름이다.

 

내레이션이 가장 자세히 알려주는 인물은 물론 제프리 다머다. 다머는 시체에 집착하며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는 욕구가 “누구에게 말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정도의 사리 분별이 가능한 인간이었다. 이 같은 내용에 더해진 백더프의 작화는 이상한 욕구를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청소년을 잘 보여준다. 그림 속 다머는 시종 짙은 그림자를 온몸에 두른 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그는 사방이 나무와 벽으로 막혀있는 자신의 방 창가에 서서 조깅하는 남자를 훔쳐본다. 그림자는 다머를 죄는 것처럼 보이고, 좁은 창문과 집을 둘러싼 울창한 숲은 충동을 참느라 자신을 고립시킨 인물의 삶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시체도착증에 공감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자기 자신과 싸우는 동안 말을 할 수도, 행동할 수도 없어 무력한 삶을 연명하는 다머의 초상은 범죄를 저지르기 전까지 그도 인간이었다는 주장에 설득력을 더한다. (그에게는 도움이 필요했다. 너무 늦기 전에 누군가 나섰어야 했다. 만약 그랬다면, 다머는 “평생 항우울제를 복용하며 아버지에게 얹혀살”지언 정 지독한 충동에 휘둘리면서 살인을 반복하는 ‘지옥 같은’ 삶을 면할 수도 있었다. 그에게 희생당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제프리 다머는 가족이 아닌 사람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다머 가족은 제프가 의지할 수 없을 정도로 위태로웠다. 사이가 나쁜 다머 부부는 그들의 첫째 아들에게 무심했다. 정신 질환과 발작에 시달린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감당하기도 벅찬 상태였다. 제프가 부모의 눈을 속이고 일탈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교사나 이웃 어른들 역시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또래 집단은 아주 가끔 그와 어울렸지만, 보통은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않았다.

 

 


 

다머는 뒤틀린 욕구를 간접적인 방법으로 해소하는 방법, 자신의 존재감을 흐리고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는 방법을 익혔다. 그는 과학실에서 아기 돼지의 표본을 훔치고, 학교에 술을 들고 다니면서 ‘마비’되도록 마셔 댔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범죄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훈련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일탈을 거듭하면서 강력 범죄를 은닉하고 또 다른 범죄를 재차 저지를 수 있는 요령을 익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다머가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저지른 범행 일부는 그가 스스로 밝힌 것이다. 첫 번째 피해자는 13년 동안 실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가 다머가 범행을 고백한 뒤에야 사망 사실이 밝혀졌다. 다머가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그 사이에 또 다른 범행 사실을 밝혔을지도 모른다. 백더프가 옳다. 동물 사체를 모으는 괴팍한 소년이 ‘괴물’로 자라나는 동안 “빌어먹을 어른들은 그때 다 어디에 있었을까?”

 

백더프는 다머에 대한 마을 전체의 무관심을 타자화로 표현한다. 다머의 일탈을 말리지 않았던 모든 사람이 <내 친구 다머>에서 타자화된다. 이 장치는 다머의 고립감을 가장 효과적으로, 어쩌면 작화보다도 더 강력한 수단이다.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존재를 알아갈 기회가 없었던 그의 입장이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된다. 다머는 이따금 평범한 삶을 흉내 낼 줄도 알았다. 졸업 무도회나 수학여행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며 나름 선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공감이나 소통은 없다. 주변인들은 다머가 보여주는 의외의 모습에 조금 놀랄 뿐이다.

 

백더프는 가파른 언덕을 가로질러 쭉 뻗은 도로와 독자에게 등을 보이며 언덕을 오르는 사람의 이미지를 여러 번 제시한다. 언덕 너머는 탁 트여있고,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머는 동물 사체를 찾아 어느 언덕을 오른다. 백더프의 하굣길도 언덕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가 해방감을 즐기며 기지개를 켜는 곳도 언덕이다. 졸업생들이 탄 스쿨버스도 완만한 언덕을 바라보고 있다. 같은 동네에서 날마다 언덕을 오르는 다머와 백더프는 “겉으로 보기에...... 매우 흡사했다”.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는 다머도 마루 너머가 보이지 않는, 환한 언덕을 걷고 있었다. 뒷모습만 보면 다머도 평범한 사내아이다. 그러나 앞모습은 다르다.

 

 


 

다머의 얼굴에는 시커먼 어둠이 드리워져 있다. 그가 첫 번째 범행을 저 지르고 나면 다머가 두르고 있던 어둠이 언덕과 시야를 몽땅 덮어버린다. 언덕을 오르는 다머 자신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저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든 그 미래가 영영 어둠에 덮여 있다는 연출은, 작품의 내용이 현실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여간 무시무시한 것이 아니다.

 

범죄 사례는 전 세계 전문가들의 연구 대상이다. 범죄에 대한 기록과 통계는 범죄 심리학부터 뇌 과학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된다. 연구는 숨어있는 범죄자를 검거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범죄 위험에 노출되어 피해자나 가해자가 될 위험이 높은 아동 - 청소년이나 재범 가능성이 있는 전과자를 교육하여 범죄 위험을 낮추는 정책에 반영하기도 한다.

 

일부 뇌 과학자는 더욱 강력한 제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강력 범죄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로 뇌 손상이나 호르몬 이상을 꼽는다. 범죄 행위를 병리로 규정하고, 강력 범죄를 반복하는 사람을 환자로 분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인식이 자리 잡으면 잠재적인 범죄자를 보다 확실하게 관리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 그들의 전망이다. 뇌에 이상이 있는 사람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지정하고,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며 격리 수용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도 있다. 실제로 그런 미래가 도래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만약의 경우에 대한 우려를 밝혀두어야겠다. 폭력과 범죄에 대한 고찰이 선행되지 채 일종의 격리 수용이 시행된다면 잘못된 편견과 제도의 오남용이라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사회를 보호하겠다며 공공연하게 인권을 침해하는 권력이 등장할 가능성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히틀러는 오늘날 폭력에 대한 논의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상징으로, <내 친구 다머>의 126쪽과 127쪽에도 잠깐 등장한다. 여기서도 히틀러는 독재와 대량 학살을 주도한 악의 화신으로 취급된다. 그는 대중문화에서 자주 가공되는 소재의 하나 친숙하다고도 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그를 언급할 때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나치당원이다. 나치당원 색출과 전범 재판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들이 끊임없이 색출되는 한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에게 적법한 처분을 내리는 작업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히틀러만 없었어도 두 번째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는 우스갯소리는 맥 빠지는 농담에 불과하다. 독일 대중이 나치에 가담하지 않고 그들의 폭력에 반대했더라면 소수 민족, 약소국의 시민, 장애인들이 대량으로 학살당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지적은 재미는 덜할지 몰라도 진실에 가장 가깝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 마커스 주삭의 <책도둑> 등 홀로코스트를 다루면서 책을 지성과 경각심의 상징으로 내세우는 작품이 이를 강하게 시사한다.)

 

미래의 범죄 예방책이 어떠하든 필자의 믿음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 폭력과 범죄 예방을 위하여 다른 모든 것에 선행되어야 마땅한 조치는 사회 전체가 폭력이 폭력임을 인지할 수 있는 경각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폭력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외면하는 행위 역시 폭력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범죄 사례를 치열하게 연구하면서 다머와 같은 흉악범죄자도 한때는 이웃이자 “친구”였다는 점을 시인하는 자세이다. 말줄임표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에게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

댓글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