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리뷰
작성일 2018.09.07 조회수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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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라기> (수신지 작)


이선인(만화평론가)


2014년 말부터 지금까지는 어떤 면에서 가장 놀라운 한국 사회의 면면을 보인 시대다. 페미니즘이 사회 전반에 이토록 강인하게 대두된 적이 있을까. 우리들에게 있어 항상 ‘다음 문제’로만 여겨졌던 미소지니(misogyny)의 문제가 놀랍도록 전면으로 드러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중심으로 발언하고 논의해나가는 광경은 생소함을 줌과 동시에 일련의 통쾌함도 함께 가져다주고 있다. 이것을 일상적 여성 운동의 시대라고 말한다고 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 활발한 ‘일상적 운동’의 근간에는 수많은 자기 고백과 폭로가 존재한다. 그동안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인지하지 못했던, 혹은 의식적으로 미루어두었던 개개별의 사건들이 있는 그대로 수면 위로 끌어올려지는 중이다. 그렇게 끌어 올려진 수많은 사건들의 안에는 표면화되지 않은 범죄로써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어지는 것들도 있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이루어져서 ‘공기처럼’ 당연시 하던 것들도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법리의 형태로 사회적 처단이 가능한 범죄적 행위들 보다, 우리가 일상어처럼 휘두르는 공기 같은 미소지니들에게서 더욱 깊은 악의 같은 것들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폭로와 그에 대한 대응은 미디어의 세계에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특히 1인 창작이 가능한 만큼 개인사의 반영이 높을 수밖에 없는 만화야 말로 이러한 전달에 있어 가장 탁월한 매체로 작동하고 있다. 자신이 청소년기에 겪었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시하는 방식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단지의 <단지>에서부터, 20~30대 여성이 가족이라는 구성원 내에서 느끼는 차별과 폭력을 그린 우다의 <그래도 되는家> 그리고 일상적으로 보이는 미소지니에 대해 소위 ‘사이다’처럼 반응하는 광경을 그린 민서영의 <썅년의 미학>까지, 플랫폼과 형식을 넘나들며 많은 작품들이 이러한 ‘폭로’의 장을 채워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류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로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 SNS 만화로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연재중인 <며느라기>가 바로 그것. 이제 막 신혼을 시작한 30대 여성 민사린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이 이야기는 제목이 품고 있는 것 처럼 ‘시댁’과 ‘며느리’라는 관계에서 벌어지는 공기 같은 차별을 그려나가고 있다.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주제, 그리고 나타나는 사건들의 디테일은 훌륭하지만 지금 함께 지면을 채워나가고 있는 ‘여성혐오의 재각인’ 만화들의 디테일과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만화는 근본적으로 SNS 만화를 표방하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 연재되는 두 개의 계정을 모두 주인공인 ‘민사린’의 개인 계정으로 꾸미고 있다는 상당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만화가 연재되고 있는 ‘며느라기’의 양 계정은 ‘민사린 입니.다’라는 프로필 이미지 업로드로 시작된다. 그 뒤로 만화가 바로 연재되지 않고 민사린과 무구영의 웨딩 사진 이미지들, 두 사람의 결혼을 알리는 청첩장이, 결혼식과 신혼여행을 알리는 포스트들이 연달아 이어진다. 그리고 이 이미지들에는 민사린 본인의 포스팅이 첨부되어, 실제 민사린이 직접 사진을 찍어 올린 것처럼 꾸며져 있다. 그 뒤에는 만화를 진행하지만, 민사린 본인에게 있어서 의미 있는 이벤트들이 있다면 그 역시 민사린 본인의 포스팅으로 가장되어 바로바로 올라오곤 한다.


 


 

내용이 이렇게 꾸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며느라기>는 이것이 픽션임을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구성 때문에 이 이야기가 작가 본인의 이야기라고 질문하거나, 아예 판단해버리는 경우들도 더러 보이긴 하지만 그를 제외한 수많은 반응들은 이것이 창작된 허구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작가 본인도, 이것을 향유하는 독자층도 이 이야기가 ‘가상의 이야기’임을 구태여 감추려고 하지 않으며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여전히 ‘민사린의 계정’으로 인지하게 만드는 많은 장치들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을 유효하지 않은 전략이라 평가할 수도 있다. 모큐멘터리는 그것이 진실이라는 환상에서 작동하며, 그것이 가상임을 전면에 드러냈을 때에 결국 환상이 깨져 효과를 잃는다는 맥락에서이다. 하지만 <며느라기>는 그것이 뒤떨어진 전략을 사용했다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어째서인지 충분히 작동하고 있다. 계정을 향한 수많은 팔로워들과 매 에피소드가 올라올 때마다 보이는 열렬한 반응을 통해 알 수 있다. 이것은 흥미로운 경우이다. 어째서 사람들은 ‘가상인 것이 확실한 가상’에 이토록 열광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며느라기> 역시 현재 진행 중인 ‘폭로’의 개념을 그대로 따르는 서사이기 때문이다. <며느라기>에 등장하는 개별의 인물들과 사건들이 실재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모든 인물들과 사건들을 독자들에게 있어선 실재하는 이야기가 된다. 그것은 우리가 동일한 서사의 원형과 현실에서 너무 쉽게 접촉할 수 있기에 그렇다. 즉, <며느라기>가 말하고 있는 ‘가상’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개념에서의 ‘가상’일 뿐, 그것을 수용하는 독자들에게 있어서는 현실 어느 구석에서 당연히 자행되고 있는 사건인 것이다.


결국 민사린은 ‘경험적으로’ 독자들에게 실재하는 인물이다. 이 작품을 주로 수용하는 20~30대 여성들에게 있어서 민사린이 작중에서 경험하는 모든 사건은 자신 혹은 자신과 가까운 이에게 이미 일어났거나 일어나는 중인 사건이다. 자신의 SNS 계정의 팔로워 리스트에 민사린이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민사린이 말하는 경험과 똑같은 ‘폭로’가 자신의 계정에 등장한다. ‘민사린’은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지만 결국엔 그 리스트의 일원 중 하나로 편입된 것뿐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민사린의 경우가 꾸며진 것이든 아니든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애시당초 SNS 건너편의 인물이 실재하는 인물인지, 그가 겪었다 주장하는 사건이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는 것이 매한가지라면, 그리고 그것을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수용해왔다면 그 인물이 자신이 픽션임을 당당하게 주장하는 것 또한 무의미 할 것이다. 그것이 공고한 진실인가의 여부보다는 그 사건의 맥락이 나의 세계 내에서 실재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더 중요한 요소일 테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며느라기>의 ‘민사린 전략’은 매우 유용하면서 뛰어난 접근법이다. 주동 인물에 대한 감정적 동일화는 작품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창구이며, SNS상에 실존하는 팔로워 민사린은 가장 담장이 낮은 창구로 작동하게 된다. 다만 <며느라기>는 바로 이 지점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만약 이것이 그저 감정적 동일화를 통한 폭로에 그친다면, 이는 그림으로 그려진 SNS 포스트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며느라기>가 그저 ‘민사린’이라는 SNS 사이다 스타를 배출하기 위한 작업일리가 없다. 그렇기에 <며느라기>는 수많은 팔로워들을 민사린의 위치에 이동시킨 후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야만 한다.


그런면에서 <며느라기>의 욕심을 볼 수 있는 부분은 민사린의 관점을 벗어난 컷들이다. 대표적으로 에피소드 6 ‘제사’의 마지막화인 7편이 그렇다. 작가(라고 알려져 있는) 수신지는 각각의 에피소드를 진행하는 도중에는 지속적으로 민사린의 관점을 투영하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 종결을 맞이할 때 즈음엔 다른 캐릭터의 관점을 편입시킨다. 이 순간, 민사린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훑고있던 독자들은 순식간에 민사린에게서 퉁겨나가게 되고, 이러한 소격감은 독자들로 하여금 조금 더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게 만든다. 6-7화는 제사를 지내는 동안 민사린에게 쏟아진 불쾌한 차별을 연속으로 늘어놓은 다음, 마지막에 형님, 시어머니 박기동, 남편 무구영의 관점을 늘어놓은 뒤 셋을 한 컷에 담아놓는다. 이를 통해 직접적인 텍스트로 풀어놓지 않아도, 독자들은 민사린의 관점에서 빠져나와 넷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하나의 사건에서 부터 비롯된 것임을 한 번에 인지하게 된다.


 


 

현실에 인접한 작품의 사건들에서 가해 인물과 피해 인물을 찾아내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일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분명히 \'피해 인물\'의 범주에 들어가는 민사린의 관점을 고수하고 있다. 그렇게 독자들이 가해 인물을 가려내게 될 즈음, 작가는 의도적으로 그들로부터 작품을 탈피시켜 모두를 동일한 선상에 놓고 보게 만든다. 만약 <며느라기>가 장기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어떠한 그림이 있다면 6-7편에서 보여줬던 그 그림보다도 훨씬 더 넓은 그림이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에서 벌어지는 차별의 문제는 개개별의 악의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주장의 그림일 것이다. 물론 아직은 그러한 주장이 모두에게 전달되는 좀 요원해 보인다. 역시나 작품의 리플에는 박기동과 무구영에 대한 직접적인 혐오가 그대로 노출되고 있다. 물론, 나의 속내를 말하자면 나도 그들이 좋진 않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이 너무나도 싫다. 하지만 작품은 누군가를 싫어하게 만들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내가 아는 <며느라기>는 그 보다는 더욱 영리한 만화다. 먼 훗날 우리가 때때로 작가의 마술을 따라 좀 더 넓은 관점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게 되었듯, 민사린 역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더 넓은 눈으로 직시하게 되는 때가 올 것이다. 그때, 우리가 시선을 맞추고 있던 민사린의 변화가 우리의 변화로 직결될 것임이 분명하다. <며느라기>가 말하고자 하는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금은 그 윤곽만을 쫓을 뿐이다. 하지만 민사린이 진짜 말하고자 싶은 메시지에 닿을 그 때엔, 그저 같은 폭로를 나누던 SNS 동료를 벗어나 더욱 넓은 관점을 건네준 마음의 친구가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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